![]() 사립명진학교 석주(私立明進學校)
우리나라 근대적 교육의 시작은 외세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고 신식학문(新式學文)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뜻이 있는 인사(人士)들은 우리의 비참한 국운(國運)을 일찍이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은 신학문(新學問)의 수용이 늦어 자연히 세계의 진운(進運)에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조국을 구하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다고 하여 이른바 '교육 구국(敎育求國)'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러한 생각이 더욱 깊어져 사립 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사상 지역 구내에 1907년(순종 1) 사립구명학교가 설립되면서 이러한 분위기가 더욱 고무되어, 당시 동래부 참사관 최덕의 도움을 받아 동래부의 후원 아래 사상 지역의 유지들이 출자를 하여 1910년(순종 4)에 사립명진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910년경 부산 시내에 보통학교와 그에 준하는 사립 학교의 숫자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러한 시기에 낙동강 하구 의 면 단위 마을에 사립명진학교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사상 지역 선조들의 교육 구국 정신이 얼마나 투철하였는지 알 수 있다.
사립명진학교의 교사(校舍)는 지금의 사상역 오른쪽으로 대한통운 앞에 건립하였는데, 기와지붕의 구식 건물이었다. 교문으로 세워 놓았던 2개의 석주(石柱) 중 한 개에는 '경상남도부산부사상면(慶尙南道釜山府沙上面)', 또 한 개에는 '사립명진학교(私立明進學校)'라고 새겨져 있다.
2개의 석주중 한 개는 [경상남도 부산부 사상면]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행방을 알 수 없고, [사립명진학교]라고 새겨진 다른 한 개는 마을의 개울에 걸쳐서 디딤돌로 사용하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여 이를 현재의 덕포동 소재 사상초등학교 교내로 옮겨 놓았는데 석주의 <사>라는 글자가 깨어져 보이지 않고 있다.
사립명진학교 초대 교장은 사상 지역에서 면장(面長)을 지낸 바 있는 지양식(池陽植)이었고, 제2대 교장은 모라 출신 학자 강대성(姜大成)이었다. 1916년 학생 수는 남자가 65명, 여자가 75명이다. 1920년 5월 5일에 학제 개편에 따라 사상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41년 4월 1일에는 사상공립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에는 사상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사립명진학교 석주는 사상초등학교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 상세문의 : 051-310-4067 • 보유수량 : 1기 • 시대구분 : 융희 3년(1909년) • 종목지정 : 0000.00.00 • 관리구분 : 사상초등학교 • 상세소재 : 부산 사상구 운산로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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